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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 특집 – 박종인의 땅의 역사> / 특집 / 20170301
<삼일절 특집 – 박종인의 땅의 역사>
방송일시 : 3월 1일 수요일 밤 9시 50분 / 특집
광복 72주년을 맞는 2017년. 지금 우리는 모든 역사를 똑바로 보고 있을까? 우리가 알지 못했고, 외면했고,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역사를 찾기 위해 박종인 조선일보 문화여행전문기자가 광활한 동토(凍土)인 만주와 러시아로 떠난다.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과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 항일독립군이 일본군에 맞서 대승을 거둔 두 전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교과서에는 승리의 역사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고, 무장독립투쟁의 쾌거라고 칭하지만 두 승리의 역사에 가려진 아픔의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을까?
박종인 기자가 옌지(연길)에서 멀지 않은 투먼시와 허룽시의 봉오동 전투 기념비와 청산리 대첩 기념비를 찾아 자랑스러운 승리의 역사가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차로 7시간을 달려 도착한 중국 지린성 퉁화현에서 전정혁 재중교포 사학자를 만난다.
두 사람은 한가로운 농촌마을 푸장향(富江鄕)으로 향한다. 푸장향의 배달학교는 조선인의 계몽과 독립의식 고취를 위해 신흥무관학교의 지원을 받아 설립됐다. 하지만 1920년 11월 3일, 총칼로 무장한 일본군이 배달학교에 들이닥쳐 교사 7명을 체포해 연행하던 중 환시링(歡實嶺)이라는 고갯길에서 이들을 총칼로 무자비하게 살해한다.
전정혁 사학자의 안내를 따라 배달학교 학살의 현장으로 추정되는 환시링(歡實嶺)과 교사 7명을 추모하는 열사릉을 찾은 박종인 조선일보 문화여행전문기자. 박종인 기자는 배달학교 7인의 열사릉의 묘비를 보며 “여기부터 저 뒤에 있는 7개의 비석이 태어난 날은 다르지만 죽은 날짜는 7명이 다 똑같습니다. 같은 날 쓰게 된 거죠. 같은 날 죽었다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이 조동호 선생의 태어난 날이 1900년이고, 죽은 날이 1920년입니다. 스무 살 때... 저는 스무 살 때 뭐하고 있었을까요? 이 추운 동북에서...”라고 말한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 들어선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 그가 의거 후 외친 말은 러시아어로 ‘조선 만세’를 뜻하는 “까리아 우라” 그는 왜 한국어도 일본어도 아닌 러시아어로 된 만세를 외쳤을까? 박종인 기자는 그 의문을 가지고 러시아 연해주로 향한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흔적을 따라가던 박종인 기자의 눈에 띈 한 인물. 노비 출신으로 가난을 피해 연해주로 이주해 러시아어를 익히고, 큰 돈을 벌어 거부가 된 최재형 선생이다. 그는 자신이 번 돈으로 ‘권업회’라는 독립운동단체를 지원하고, 안중근이 하얼빈 의거 당시 기자로 속해있던 대동공보를 설립했으며, 민족교육을 위해 한민학교를 지원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박종인 기자는 그의 마지막 흔적을 보기 위해 연해주 우수리스크를 찾아간다. 그곳에는 최재형이 마지막 순간까지 살았던 고택이 남아있다.
1920년 4월 3일, 최재형과 가족들은 일본군이 곧 들이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도망치라는 가족의 권유를 단호히 거절한 최재형은 가족을 위해 고택의 복도 끝 ‘죽음의 문’을 열고 스스로 일본군에게 잡힌다. 그리고 아무런 재판 절차도 없이 우수리스크 형무소 인근의 언덕에서 다른 독립운동가 2명과 함께 총살을 당한다.
냉전으로 인해 우리가 쉽게 찾지 못했던 러시아였기에 우리가 몰랐던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일생이 가슴 먹먹하게 다가온다. 최재형의 딸 최올가의 자서전을 통해 그의 생애를 알게 된 박종인 기자는 “한 가정의 가장이고, 남편이고, 아버지였던 최재형은 그렇게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겨주고 죽음을 택했습니다. 냉전 혹은 분단이라는 시대 환경을 탓하기에는 우리의 무관심이 너무나도 컸기에 우리는 지금 역사의 반쪽만 알게 됐습니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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