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스룸

<모란봉 클럽> / 93회 / 20170624

2017.07.05

<모란봉 클럽>


방송일시 : 6월 24일 토요일 밤 11시 / 93회


호국 보훈의 달 특집<이산가족, 넘을 수 없는 운명의 갈림길>


출연: 이순규(제20차 이산가족상봉) 최가인(함경북도 무산)
     문영찬(대가족 탈북)+손생금(아내)&문은하(큰딸)&문은옥(막내딸)
     지해남(선전대 가수) 이윤걸(청암산 연구소) 김철웅(평양음악무용대학)
     김일국(최연소간부) 이유미(밀수의 여왕) 김지영(김일성종합대학) 박수애(아리랑 3회출전)
     김가영(상위1% 엄친딸) 한서희(인민보안성 협주단) 김은아(양강도 혜산)
    / 안지환, 한영, 성대현, 김경화


▶호국보훈의 달 특집! 이산가족, 넘을 수 없는 운명의 갈림길
이산가족, 넘을 수 없는 운명의 갈림길이라는 주제로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이산가족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을 갖는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듣기에 앞서 최근 우리 측의 교류제안에도 불구하고 ‘집단 탈북 종업원들을 송환하기 전엔 이산가족 상봉이란 없다’는 입장을 고집하고 있는 북한에 대해 이산가족의 문제는 국가 간의 이해관계를 떠나 그들의 아픔을 생각해서라도 하루빨리 대타협을 이루어야 할 것 같다는 말로 시작한다.


▶ 결혼 6개월 만에 남편과 헤어져 65년 만에 상봉! 제20차 이산가족 상봉 이순규
2015년 제20차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영화 같은 재회를 한 87세 이순규가 <65년간 멈춰버린 시계>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출연한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7월에 남편과 헤어지게 된 이순규는 그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순규는 68년 전, 이북 프락치들이 남편에게 찾아와 열흘 동안만 훈련하고 보내준다고 하며 데려갔던 일이 남편과 65년간 이별의 시작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당시 이순규는 임신 3개월의 임산부의 몸이었고 결혼 7개월의 신혼부부였던 것. 전쟁으로 인한 생이별을 하게 된 이순규는 재가하지 않았고 남편이 없는 시댁에서 아들과 시동생, 조카 넷까지 새벽밥 해가며 키우며 살았다고 한다. 새벽에 방문 너머로 들리는 시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남편의 기침 소리와 닮아 화들짝 놀라며 밖을 나가본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며 명절이 되어 다른 집에 애들 손을 잡고 가는 남자를 보면 아버지라는 소리도 못 불러본 아들 생각에 가슴이 찢어졌다고 한다. 10년 동안 하루 같이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던 어느 날, 꿈에 찾아온 남편을 본 이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겠다고 생각했고 죽었다고 생각하여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순규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을 겪었지만 덤덤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반면, 스튜디오는 눈물바다가 되었다는 후문. 그렇게 또 37년이 지나 2015년. 아들에게 걸려온 전화에서 북한에서 남편이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65년간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남편이자 아들의 아버지가 살아있었다는 사실에 거짓말인 줄 알았다는 이순규. 이후 상봉 날만 기다리며 65년 만에 만나는 남편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다고 한다. 무슨 선물을 샀냐는 패널들의 질문에 시집갔을 당시 시계가 없어 답답해 남편에게 시계를 하나만 사달라고 부탁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은 가을에 농사를 지으면 그 돈으로 시계를 사주겠다고 약속하였고 그해 여름에 떠나버렸던 남편에게 한이 맺혀 직접 시계를 사 갔다고 답했다. 덧붙여 북한에 10을 사가면 8은 빼앗긴다는 말에 시계 두 개를 사서 갔다고 말하며 슬픈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이후 상봉 당시의 영상을 보며 대화를 나눴다. 65년 만에 보는 남편의 얼굴을 한 번에 알아봤다는 이순규는 당시 본인을 못 알아봤던 남편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상봉 당시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답답하던 속과 달리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며 예순다섯이 먹도록 아버지라는 이름을 불러보지 못한 아들에게 아버지를 만나게 해준 마음에 한이 풀리는 느낌이었다는 말에 남북한 패널들은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고 한다. 또 상봉 당시 65년 만에 만난 남편에게 불러주고 싶었다던 ‘추억의 소야곡’은 모두의 눈시울을 적셨다. 특히 박수애는 본인의 할머니와 닮은 이순규의 모습에 “한 번만 안아보고 싶다”며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모두의 마음을 저리게 했다. 마지막으로 이순규는 현재 북에 가족들이 있는 북한 패널들에게 본인도 65년 만에 남편을 만났으니 희망을 잃지 말라는 말을 전했다.


▶먼저 탈북한 큰 딸 찾아 임산부와 대가족 탈북! 새내기 탈북 가족, 문영찬 회원
(아내 손생금 / 큰딸 문은하 / 막내딸 문은옥)
문영찬은 말없이 먼저 탈북한 딸을 찾아 가족들과 집단 탈북을 했다. 함께 탈북한 막내딸은 당시 임신 6개월이었으며 총 8명이 함께 탈북했다고 전해 모든 패널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2007년에 떠난 큰딸 때문에 북한에서 추방을 당하고 온갖 고생을 다 했다는 문영찬 가족은 2008년 5월 28일에는 자식이 없어진 부모들을 혜산시 경기장에 모아놓고 시민들 앞에서 총회를 한 것을 시작하여 산골짜기로 추방되었던 사연을 전했다. 직업이 무효가 되고 노동자에서 농작원까지 신분이 추락하였고 매일같이 쉬지 못하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죽도록 일만 했던 일을 전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당시 중학교 2학년까지 다니고 추방당해 학교도 못 다녔다는 막내딸 문은옥은 하루 80리 걸어 다니면서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는 물건을 가져다주며 발에 물집이 잡히도록 일을 하며 추방된 집안이라는 수모를 당하고 살았다고 한다. 또 문영찬이 직접 지은 집은 일전도 받지 못하고 추방되어 창문에 유리도 없고 사람이 살 수 없는 집을 받아 엄청난 고생을 했다는 말에 이유미는 덧붙여 가족의 행방불명은 24시간 감시가 붙어 일반적인 생활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가족들의 고생담에 옆에서 눈물을 흘리던 큰딸 문은하는 처음에 돈을 벌 생각으로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중국을 갔지만 생각하던 것과 달리 인신매매로 팔려갔다고 전했다. 그렇게 중국에서 지낸 지 몇 년 뒤 먼저 남한에 정착해 가족들을 남한으로 탈북시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고 한다.


이에 김은아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라는 키워드로 탈북 당시 어머니에게 사실을 말할 수 없던 사연을 전했다. 남한에 먼저 와있던 이모의 “남한으로 오지 않겠냐”는 말에 고민하다가 남한행을 결정하였고 그것을 어머니에게 말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출발을 하려던 새벽 부엌에서 감자를 깎으시며 평소 감자떡을 좋아하는 김은아에게 감자떡을 해주던 어머니 모습에 울컥했지만 탈북 사실을 말할 수 없어 눈물을 삼키며 떡을 먹었던 사연을 전했다. 덧붙여 할머니랑 자라며 장에서 장사하시던 할머니를 멀리에서 지켜보고 탈북을 했고 지금 가족들과 함께 온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또 부모님에게 탈북 사실을 말할 수 없던 김일국은 <시한폭탄을 안은 아버지>라는 키워드를 소개했다. 탈북을 결심했던 당시, 가방을 싸는 김일국에게 탈북 사실을 모르시던 아버지께서 옷을 더 넣으라는 말과 함께 평소에는 잘 다녀오라는 말을 했던 것과 달리 건강히 지내라고 인사를 대신했다고 한다. 탈북 사실을 감추느라 눈을 피하던 김일국을 다시 불러 건강히 지내라고 말씀하셨던 아버지께서 현재 심장이 나쁘셔서 쇼크가 자주 온다며 김일국은 눈물을 흘렸다. 아프신 아버지는 지금도 통화를 하게 되면 처음부터 끝까지 김일국의 건강을 걱정하시고 꼭 성공하라는 말을 전하신다며 두 번 정도 쇼크가 왔던 심장이 언제 멈출 줄 몰라 불안하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김은아, 김일국과는 달리 가족들과 다 함께 탈북한 문영찬은 아슬아슬 했던 탈북 당시의 이야기를 펼쳤다. 임신 6개월의 막내딸을 데리고 오는 것이 주머니에 달걀을 넣어 가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튜브두개에 바람을 넣고 그 위에 판자를 올려 뗏목으로 강을 도하하면서 궂은 날씨에 위험한 순간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 와중에 아내 손생금은 남한에 있는 큰딸이 몸이 약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꿀과 밥을 약 10kg을 매고 있었고 그 꿀을 태국까지 가지고 갔다고 해 놀라움을 샀다. 그렇게 힘들었던 탈북과정을 거쳐 남한에 도착했고 하나원에서 10년만에 큰딸과 재회하게 되어 당시 그 곳이 눈물바다가 되었다는 후문.


먼저 탈북한 가족과의 재회의 이야기에 김가영과 김지영이 탈북하며 겪은 이야기를 <빵 한 조각이 집 한 채 값?!>이라는 키워드로 소개했다. 김지영은 탈북 당시 브로커가 돈 때문에 함께 탈북 했던 김가영과 갈라놓았고 김가영보다 후에 한국에 입국해 국정원에 들어갔던 이야기를 전했다. 국정원에서는 보안 상 먼저 조사를 받은 사람과 이야기는 물론 눈도 마주칠 수 없었는데 밥을 먹으러 식당에 갔을 때 김가영을 보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고 한다. 김가영도 자신을 발견했는지 근처를 왔다 갔다 하며 정수기를 맴돌던 모습이 마음이 아팠지만 안부를 물을 수도 없었다고.. 그날 저녁 담당 선생님이 몰래 불러 빵을 주며 김가영이 “언니가 마른 모습에 마음이 아파, 간식 받은 빵을 언니에게 전해달라”고 했다며 그 빵을 먹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김가영은 중국에서 헤어질 때는 살도 통통했던 언니가 반쪽이 되어서 온 모습을 보고 반갑고 안쓰러웠지만 그 마음을 전할길이 없어 사정사정을 해서 빵을 전했다며 눈물을 훔치는 두 자매의 사랑을 들을 수 있었다.


<평생 지울 수 없는 그의 흔적>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나온 한서희는 오빠의 얘기를 하려고 한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화 통화를 하는데 아프지 말라고 하던 오빠가 며칠 뒤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다시 못 보겠구나 라는 생각에 온 가족이 슬픔에 빠져 있다가 오빠의 탈북으로 잡혀갈 위기에 처해 가족도 탈북을 결심했다고 한다. 중국에서 몽골까지 19시간을 걷다가 수용소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먼저 간 오빠가 걱정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려고 누웠던 한서희의 눈에 익숙한 글이 하나 보였다고 한다. 탈북하는 사람들이 적어놓은 글 들 중에 낯익은 글씨와 문체가 보였고 오빠가 탈북하며 같은 곳에 머물렀고 가족을 그리워하며 글을 썼던 것. 수소문을 해보니 오빠가 머물렀던 것이 맞았다는 말에 남북한 패널들은 영화같다고 덧붙였다.


▶인신매매 당한 딸을 위한 엄마의 은밀한 공작! 최가인
19살에 중국에 있는 친척들을 믿고 친구와 겁 없이 탈북을 했지만 북송되었다는 최가인은 그때부터 노동단련대 안에서 탈북 작전을 치밀하게 세웠다고 한다.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모범수로 활동하며 면회시간에는 엄마에게 부탁해 탈북 작전을 도모하며 동네를 돌아다니며 ‘인분까기’ 업무까지 했다고 한다. 퇴소 한 달 전 또 ‘인분까기’를 하다가 탈출, 남자로 변장까지 하고 두만강을 건너 탈북에 성공했던 것! 그러나 중국에 호적이 없어 3살 많고 시골에 사는 조선족 남자에게 시집을 가 가난 때문에 힘든 일까지 하게 되었는데.. 딸을 보러 중국에 왔던 어머니는 그런 딸의 모습에 북으로 돌아갈 수 없다며 그 곳에 눌러 앉았고 어머니를 찾으러 온 아버지에게 절대로 못 간다며 으름장을 놓았던 것! 그렇게 핵빨갱이 충성분자였던 아버지와 동생 세 명까지 중국으로 집단 탈북을 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7년 동안 살다가 아들을 호적에도 못 올리고 사는 것이 마음아파 남한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탈북 도중 엄마, 아빠, 아들은 청도 영사관으로, 네 자매는 북경 영사관으로 찢어져 아들을 보지 못해 속이 타들어 갔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그렇게 지내던 영사관에서 모란봉 마당발 이유미를 만났다고 해 패널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이후 1년 5개월 만에 가족들과 함께 만났던 이야기를 덧붙였다.


▶남한 노래 한곡으로 아들과 생이별 하게 된 지해남
홍도야 우지마라 라는 노래 한곡으로 목숨과 같은 아들과 이별하게 되었다며 모란봉클럽에 먼저 문을 두드린 지해남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먹고살기 어려웠던 시절 남편과 이혼하면서 아들과도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안전부에서 지해남을 체포했고 그 이유가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불렀던 남한노래 ‘홍도야 우지마라’ 때문이었던 것! 그로인해 노동 교화소 생활을 3년 동안 하였고 형기를 마친 후 남편에게 부탁해 아들을 만났던 추억을 덧붙였다. 당시 시장에 가서 아들이 먹고 싶다고 하는 것들을 다 사 먹이면서도 배가 갑자기 불러오는 아들이 잘못될까 싶어 소화제까지 먹여서 들여보냈던 그 모습이 마지막이 되었다고 하는데.. 탈북 후에 북에 있는 오빠를 통해 아들을 소식을 굶어서 죽었다고 들었다는 지해남은 당시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혼자 남한에 와서 생활을 하던 도중 중국에 있는 언니의 집으로 북에서 편지 하나가 왔고 그 안에 들어있던 사진을 보고 지해남은 다시 희망을 가졌다. 훌쩍 커버렸지만 본인의 눈과 코, 입매가 닮은 아들의 사진이었던 것! 지해남은 그 사진을 보고 지금까지도 아들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