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스룸

<박종인의 땅의 역사> / 19회 / 20171015

2017.10.16


 

<박종인의 땅의 역사>

비겁한 왕, 산성에 숨다. – 남한 산성 47


방송일시 : 1015일 일요일 오전 11 40분 / 19회

 

이번 주 『박종인의 땅의 역사』는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강화도 등 병자호란의 흔적이 남아있는 땅의 역사를 찾아간다. 주요사건을 재미있는 드라마 형식으로 재구성하고,「인조실록」「병자록」「산성일기」「연려실기술」등 역사적 고증을 통해 심층적으로 알 수 있다.

 

병자호란, 47일간의 치열한 전투

‘도성 안에는 10세 미만의 아이와 70세 넘은 이들 외에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으며

그나마도 추위와 굶주림에 목숨이 위태로웠다’ - 연려실기술

 

‘포개진 시신들 사이로 젖먹이들이 어미를 찾아 기어 다니며 울고 있다.- 강도록

 

‘적에게 욕을 보지 않으려는 부인들이 (강화 갑곶 앞) 바다에 빠졌다.

(여인들의 흔적인) 머릿수건이 마치 연못에 떠 있는 낙엽처럼 바람에

날려 둥둥 떠다녔다. - 연려실기술

 

47일 간의 전쟁. 그러나 그 전쟁으로 인해 수없이 많은 백성들이 죽고, 50만이 넘는 사람들이 청나라로 끌려갔으며 왕은 청나라 황제에 삼배구고두례(세 번 절하고 절할 때마다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로 항복의 예를 바쳤다. 1636년 병자호란 이야기다.

 

대체 조선은 왜 47일의 전투만으로 항복해야만 했는지,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인조는 왜 그렇게 쉽게 한양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도주해야만 했을까?

 

임금이 남한산성에 거하였다

청나라가 침략하자마자 단 하루 만에 인조가 피난한 곳! 바로 남한산성이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약 15만 평의 규모로 서울의 남쪽을 지키는 튼튼한 요새 남한산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대한민국의 중요한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그러나 1636년 겨울, 이곳 남한산성은 치욕의 장소였다.

임금 인조와 신하들은 도성인 한양을 버리고 이곳으로 도주했다. 임금이 버린 도성 안팎의 백성들이 청나라 군사들에 의해 어떻게 유린되었을지는 일일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슬프고도 아이러니한 사실이 하나 있다. 남한산성과 행궁을 지은 이가 바로 인조였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도망할 곳을 미리 알기라도 한 것일까? 남한산성은 인조에게 피난처였을까, 감옥이었을까?

 

왕을 만든 공신들의 만행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앉게 된 인조.

그의 뒤에는 그를 왕으로 만든 1등 공신인 김자점, 김류 등이 있었다.

이들은 과연 병자호란에서도 1등 공신이었을까?

 

병자호란은 1927년 일어난 금나라와의 전쟁인 정묘호란 이후 9년 만에 되풀이되었던 청나라와의 전쟁이다. 두 번의 전쟁에서 패할 수밖에 없었던 인조와 그의 공신들 이야기를 돌아본다.

한편, 당시 강화도 감찰사로 있던 김류의 아들 김경징- 강화를 금성철벽으로만 믿고 청나라 군사가 건너오지는 못한다고 호언장담하며, 아무런 대비책도 마련하지 않은 채 매일 술만 마시던 그의 만행. 그리고 가을이면 강화도 갯벌을 붉게 물들이는 나문재가 ‘경징이풀’이라 불리게 된 역사적 이유까지... 당시 참혹했던 강화도의 상황을 돌아본다.

 

■ 47일의 전쟁, 그 후

병자호란, 전투는 끝났으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서울 송파구의 ‘삼전도비’. 청나라 전쟁에서 패한 후 자신들을 침공했던 청나라 황제를 위해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이름으로 세워준 비석이다. 치욕의 역사이나 기억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는 ‘패전의 역사’. ‘삼전도비’를 통해 당시의 무능했던 역사를 반성해볼 수 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50만 명의 조선의 백성이 청나라의 포로로 잡혀간다. 그리고 몇 년 후 청나라로 끌려갔던 여인들 중 그리워하던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을 외면해 버리는 가족과 나라.

 

서울 홍제천을 찾아 슬픈 ‘환향녀’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들을 보호하지 못한, 그러면서도 여인들을 구속했던 조선의 아픈 역사를 느껴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