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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역사> / 42회 / 20180401

2018.04.06

<땅의역사> / 42

‘조선 경제 붕괴 예언서, 허생전(許生傳)’

방송날짜: 201841일 일요일 오전 11 50분  

 


* 구한말, 미국 주간지 콜리어스(Colier's)에 실린 의문의 사진 한 장!

* 1700년대 조선, 남산 밑 묵적골(墨積洞)로 떠나는 시간 여행!

* 조선 시대 북학파들의 핫플레이스, 원각사지 십층석탑

* 조선 경제 수탈의 뼈아픈 현장, 인천

 

조선 경제 붕괴 예언자 허생을 따라나선 박종인의 땅의 역사.

 

경제가 붕괴돼버린 구한말, 설상가상으로 일제의 경제 수탈까지 극심해진다.  암울하기만 했던 우리의 그때 그 시절. 그런데, 구한말 100여 년 전에 이미 조선 경제 붕괴를 경고했던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바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서 북학사상을 펼쳤던 연암 박지원(朴趾源). 박지원의 조선 경제 붕괴 예언서인 허생전(許生傳) 속 허생(許生)을 통해 조선 경제를 샅샅이 살펴본다!

 

# 구한말, 의문의 사진 한 장?

20세기 초 미국 잡지였던 콜리어스(Colier's) , 190464일 자 기사에 의문의 사진

한 장이 실린다. 대한제국 수도인 서울을 배경으로, 한 외국인이 알 수 없는 물체들 위에 위풍당당 서 있는 사진.

외국인의 정체는 러일 전쟁을 취재하러 온 종군기자 로버트 던이었고, 수상한 물체의 정체는 바로 어마어마한 엽전 더미였다.

로버트 기자는 취재비로 쓰기 위해 미국 돈으로 150달러를 환전하는데…

"호텔 사동이 소리쳐서 나가 보니 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돈더미는 둘레가 60피트(18m)에 높이는 3피트(90)였다. 서울에 있는 환전소들이 금고가 바닥나 모두 문을 닫았다."라고 기사에 밝힌 로버트 던.

환전하러 간 심부름꾼 혼자서는 도저히 들고 올 수조차 없었다.

산더미 같은 엽전의 일부만 들고 2주간 취재를 마치고 왔다. 그사이 장정 스무 명이 밤낮으로 내 재산을 지켰다. 돈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에게 일당을 지급하고 나니 돈더미가 녹듯이 사라졌다."

이 또한 로버트 기자가 기사에 밝힌 말이다.

그 사진 한 장에 당시 대한제국이 처한 경제 상황이 다 담겨 있다.


# 1700년대 조선, 남산 밑 묵적골(墨積洞)로 떠나는 시간 여행

연암 박지원의 청나라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일부 실린 소설 '허생전(許生傳)

글만 죽도록 읽던 딸깍발이 선비 허생(許生)이 바로 이 소설 속 주인공이다.

남산 밑 묵적골에서 글만 읽던 허생을 대신해 그의 처가 남의 바느질품을 팔아 입에 풀칠했다.

돈 좀 벌어오라는 아내 성화에 못 이겨 집을 나온 허생.

허생은 한양의 제일가는 갑부 변 부자에게 빌린 1만 냥으로 제수용 과일을 매점하고, 갓을 만들 말총까지 매점했다. 얼마 못 가 조선 팔도는 제사를 못 지낼 형편에 이르러 허생에게 두 배의 값으로 과일을 팔았던 사람들이 도리어 열 배의 값을 주고 사 가게 되었고, 나라 안의 사람들이 머리를 싸매지 못해 망건값이 열 배로 뛰어올랐다.

허생은 5년 만에 100만 냥을 벌었다. 허생이 중얼댄다. '나라 꼬락서니 알 만하구나.'
1만 냥으로 조선의 경제를 쥐락펴락했던 허생.
연암 박지원은 허생을 통해 조선 경제 붕괴에 대해 경고하고 있었다.

 

# 조선의 핫플레이스, 원각사지 십층석탑

허생전의 저자인 연암 박지원, 북학사상을 펼쳤던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박지원을 포함한 홍대용·박제가·이덕무·백동수로 이루어진 북학파는 조선 후기,

청나라 문명의 우수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배우자고 주장한 실학자들이다.

우리나라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조선의 핫플레이스로 불리는 이유 또한 북학파와 연관이 있다.

그들의 또 다른 이름은 백탑파인데, 그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멀리서 보면 하얗게 빛이 났기 때문이다. 박지원이 살던 지금의 서울 재동 집에서도 이 백탑이 보였다고 한다.

박지원의 집 근처에 모여 살며 자신들의 세계관을 논하고, 학문을 이야기하며 우정을 나눈 북학파.

그래서 백탑 주변에 살던 그들을 백탑파라고 불렀다. 이들은 수도 한양의 중심에서 진보와 개혁을 꿈꿨다.

많은 지식인의 호응을 불러일으키며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시작된 박지원의 고민. 그리고 그 고민이 탄생시킨 인물 허생. 허생을 통해 박지원이 실현하고자 했던 세상은 과연 이뤄졌을까?

 

# 조선 경제 수탈의 현장, 인천

1883, 인천이 외국에 문을 열었다. 취약한 조선 경제에 불어닥친 위기.

수많은 외국 세력이 인천의 항구를 통해 개항의 문을 두들겼고, 많은 세력이 이 땅에 자리 잡았다.
약해빠진 조선 경제를 향한 외세의 수탈 게이트(Gate)로 이용된 제물포. 인천에는 그 뼈아픈 수탈의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대표적인 흔적으로 옛 미두취인소 자리를 들 수 있다.

미두취인소란 1896년 인천에 설치된 조선 최초의 곡물 선물거래소이다.

일제가 우리나라 미곡 시장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던 곳으로, 곡물을 거래했지만 수탈이었다.

한 꺼풀 벗겨 보면 조선 경제 수탈의 현장, 그 자체였던 인천.

그곳은 조선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악마의 소굴이었다.

허생의 경고를 무시한 결과로 열강의 침탈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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